※본 리뷰는 영화와 소설 모두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난 오래 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을 보았다. 공포스런 분위기를 잘 살린 영화였고, 잭 니콜슨의 연기는 상당히 강렬했다. 그러다 스티븐 킹이 샤이닝의 영화판을 매우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원작 소설에도 호기심이 생겨서 읽어봤다.
일단 둘은 전개는 비슷하지만 완벽하게 다른 이야기다. 소설 샤이닝은 샤이닝 능력과 관련된 세계관이 매우 중요하다. 닥터슬립으로 이어지는 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큐브릭은 닥터슬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에 샤이닝 능력과 관련된 세계관이 중요하지 않았다. 잠깐 언급되기는 하지만 샤이닝 능력으로 뭔가를 해결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한 수준이다(제목은 여전히 샤이닝이지만).
소설의 샤이닝 능력은 역할이 명확하다. 기본적으로 오버룩 호텔의 유령들이 깨어나는 것 자체가 샤이닝 능력 때문이다. 소설의 클라이막스는 대니가 자신의 샤이닝 능력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는 부분일 것이다. 자신을 공격하려던 아버지의 정신이 다시 돌아오게 만들어 시간을 끌고, 그 덕에 호텔의 보일러가 폭발하게 되며 오버룩 호텔이 끝장나게 된다. 마지막에 대니와 웬디를 구하게 되는 딕 할로런도 샤이닝 능력 덕분에 대니를 구하러 올 수 있었다. 이야기의 발단도 샤이닝 때문이고, 해결도 샤이닝 덕분이다. 샤이닝 능력자 대니의 성장이 주된 내용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반면 영화에서 샤이닝 능력은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물론 공포를 조장하는 역할은 충실히 한다. 하지만 발단이 샤이닝 능력 때문인지 불분명하며, 딕 할로런은 설상차를 남기고 사망한다. 아버지의 정신이 돌아오는 일도 없었고, 호텔이 폭발하는 일도 없었다. 미로에 아버지를 가두고 탈출하는 것은 샤이닝 능력 덕이 아니라 그냥 기지를 발휘했을 뿐이다.
또한 매체의 한계로 인해 아버지의 위치가 변한다. 소설에서는 아버지 잭의 내면이 충실하게 표현된다. 작가를 꿈꾸지만 수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교사 생활을 하면서 생기는 가족에 대한 원망. 학교에서의 트러블로 교사 생활도 접고 호텔 관리인으로 취업하면서 고립된 환경에서 창작에만 몰두하겠다는 희망. 술마시고 아들의 팔을 부러트린 일로 금주를 하는 데서 오는 억눌린 욕망. 그런 자신을 늘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아내에 대한 압박감. 그에 따라 딸려오는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오버룩 호텔의 망령이 자신에게 임무를 내렸을 때 자신이 쓸모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아내와 아들을 죽이러 나서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영화에서 그런 배경을 다 설명하면 너무나 지루해지기 때문에 이야기들이 삭제된다. 그래서 남는 것은 그저 고립감으로 미쳐가는 잭 토렌스 뿐이다. 다양한 고뇌를 통해 상당히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준 소설의 잭 토렌스와 달리, 영화의 잭 토렌스는 공포의 아이콘이 되는 것으로 만족한다.
물론 큐브릭의 샤이닝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묘사가 너무 디테일해서 가끔은 지루하게 느껴지는 경우조차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원작 소설의 과도한 디테일 때문에 오히려 영상화했을 때 소설의 맛이 안 살아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그것’이 매우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큐브릭은 필요한 소재와 장면만 추려서 확실한 공포와 영상미를 택했다. 오히려 샤이닝 능력을 제대로 살리려 했다면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재미있게 보았다면 다른 쪽도 비교하며 보는 것을 권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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